항공으로 보는 세계(3):아이슬란드

인구비율로 관광객이 제일 많으며 또한 항공이용객이 제일 많은 도시는 어디일까?

위 질문에 답은 간단하다. 아이슬란드이다. 총인구 33만의 이나라의 가장 큰 국제공항인 케플라비크(Keflavik)국제공항의 연이용객은 680만명을 2016년에 돌파하였으며, 2040년에는 총 이용객 2500만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2025년까지 확장계획을 세우고 있을 정도로, 인구 30만 미니 국가의 항공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또한 연간 출국하는 아이슬란드 시민도, 2017년 1분기만 하더라고 15만을 돌파하였을 정도이며, 올해는 약 40만을 바라보고 있을정도로 자국인의 해외여행도 활발하며, 또한 관광객도 2017년 200만을 예측할 정도로, 인구대비 관광객수가 7배에 달하는 나라로 부상할 예정인 국가이다.

(한국으로 치면, 인구 5천만중, 매년 7천만 정도가 해외여행을 하며, 관광객 수는 매년 3억 5천명이 방문하는 비율과 같으며, 인천공항 승객은 전체 대한민국 인구x 20배로 보면 된다)

이러한 추세는 최근의 추세로써, 2009년 180만 이용객이었던 케플라비크 공항은, 아이슬란드 경제가 관광업 버프로 회복되면서 이용객이 680만(2016년)으로 상승하게 되었다.

동시에 알루미늄 및 어업이 주요 수출품이었던 아이슬란드는, 전체 수출액에서 관광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2010년 18%에서-2016년 31%로 증가하였으며, 이러한 관광붐은 아이슬란드 경제가 세계금융위기에서 회복되는데에 엄청난 도움이 된 중요한 원동력이었으며, 동시에 실물경제가 회복이 되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현재 케플라비크 공항에서 갈 수 있는 전세계 목적지는 68개 이며, 대부분은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으나, 최근 중동항공사들을 중심으로 취항움직임이 가속화 되고 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아이슬란드의 국제교류가 북미와, 유럽중심에서 다변화 하는데에 도움을 줄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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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으로 보는 세계 (2): 아타투르크 공항의 허브화

지난 10여년간 갑자기 항공교통의 요충지가 된 도시는 여러곳이 있으나, 특히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한 걸프 연안과, 터키의 성장세는 주목할만한 성장세이다, 특히 터키 같은 경우 지난 5년간 정세가 불안해 졌으나, 아타투르크 공항의 허브화는 가속 되고 있고, 터키 항공의 성장과 더불어 계속 되고 있다.

아타투르크 공항은 2002년 만 하더라도, 연간승객 1천만명을 겨우 넘은 공항이었으나, 현재는 연간 여객이 6천만명인 공항으로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이중 국제선 승객은 4천 1백만명으로 2002년 8백만밖에 안되던 시절을 생각한다면 상전벽해와 같은 성과를 이룩 하였다.

이러한 증가세는 터키항공의 민영화 이후 노선확충에 의한 공이 크다. 터키 항공은 현재 세계최대의 취항지(296도시)를 보유한 항공사로써, 2015년 현재 연간 6천1백만명을 수송하는 세계적인 항공사이다. 이러한 확충세는 작년(2016년) 정세가 어지러운 가운데에서도 계속 되어서, 2016년 쿠데타 및 공항 폭탄테러로 인하여 승객수의 감소가 겨우 2%대로 나온거는, 터키항공의 물동량의 잠재력을 알 수 있는 지표이다.

2017년 현재 아타투르크 공항은 런던 히드로, 파리 드골, 독일 프랑크푸르트, 네덜란드 스키폴에 이은 유럽의 5대 허브 공항으로 성장하였으며, 전세계 260개 도시로 가는 직항편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스탄불 제2의 공항인 사비하 곡첸공항의 이용객인 2천 8백만까지 합친다면, 이스탄불의 연간 항공 이용객은 거의 9천만명에 다가가게 되었다.

사실 아타투르크 공항의 서비스는 공항 승객 증가세에 비하여, 미비한 부분이 많으며, 사실 서비스 측면에서는 그렇게 좋은편은 아니다. 그러나 터키의 케이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것은 허브화는 반드시 공항시설의 질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허브화는 자국 항공사의 물동량 증가세와 관련이 높으며, 공항시설은 공항시설이 얼만큼 늘어난 트래픽을 처리하나와 관련이 있을뿐, 시설의 질, 서비스와는 크게 상관은 없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여하튼 간에. 터키가 최근 정세불안과 술탄 에르도안의 폭압적인 정치로 약간 이상한 나라가 된거는 사실이지만.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는 국제도시로써 지리적 이점과, 터키의 유럽과 중동의 중간 이라는 이점을 바탕으로 세속적인 국제도시로 남을거라는거는 전망은 이스탄불이 국제도시로 남는 한 계속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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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으로 보는 세계(4) 외교관계가 항공노선에 미치는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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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대만 국적기 차이나 에어의 TPE-AMS간 항로

사진1. 에서 볼 수 있듯이, 대만 국적기의 유럽 직항편은 상당히 돌아하는 노선을 채택한다. 타이페이를 이륙한 항공기는, 대한해협을 통과하여, 동해상공을 거쳐서, 시베리아 영공에 도달하며, 그 이후 일본발-유럽행 비행기의 노선과 합류하는 방식의 노선을 취한다.

이 사진에서 알 수 있는점은 한나라의 국적기가 이용하는 항공로는 외교적 상황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며. 외교적인 지위는 항공사의 운신의 폭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대만은 세계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주권 국가이지만, 대만여권은 중국여권보다 무비자 혜택이 훨신 많은편이며, 유럽, 미국으로의 여행은 무비자 혜택을 받는 나라중에 하나다. 그러한 이유로 대만 타이페이 타오위안 공항은 연간 4천 2백만명이 이용하는 세계적으로 유수한 여객처리를 하는 공항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만 항공산업에서 아킬레스건 같은 사항은, 중국행 직항편을 제외하면, 대만 항공기는 중국상공을 통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국적 민항기에게도 대만영공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같은 제재가 적용이 되나, 대만은 작은 나라이기에, 중국영공을 통과하지 못하는 제재 보다는 타격이 거의 없는 제재이다.

그러한 점에서, 냉전시기 한국이 유럽과의 직항편 없이, 방콕-중동 지방을 거치는 남회항로와, 미국 엥커리지를 거치는 북회항로를 이용하여서 유럽과 교류 했듯이, 항공기 항속거리가 기적적으로 늘어난 최근까지 대만발 유럽행 노선은 완전한 직항은 없었으며, 주로 방콕을 경유 노선을 운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유럽과의 직항노선 운항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2000년대
소련 붕괴이후 러시아의 시베리아 영공통과 허용조치와 맞물려, 새롭게 나온 Airbus 340. 2000년대 들어서 나온 기종은 Boeing 777-300ER의 도입은 대만에서도 유럽과의 직항편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첫 사진에서 처럼, 일본을 돌아가는 대만-유럽간 직항루트가 2000년대 중반부터 가능해지기 시작하였으나, 중국영공을 통과할 수 있는 경쟁지역 항공사 노선보다는 무려 2시간 30분 이상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서 홍콩-암스테르담 행은 약 1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지만, 타이페이-암스테르담 행은 12시간 40분은 기본소요시간이며, 맞바람을 맞이할 경우에는 13시간 이상 소요되는 노선인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대만 국적기의 유럽 노선은 중국을 통과하지 못하는 비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외교분쟁 및 외교지위로 인하여 피해를 보는 항공노선은 한두개가 아니다, 이러한 국가로는 이스라엘이 대표적인데, 사진2, 3에서 볼수 있듯이, 텔아비브-방콕노선은 세계적으로 특이한 항로대를 지니고 있는 노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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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이스라엘 EL AL항공의 TLV-BKK노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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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TLV-BKK노선의 비행 소요시간 10시간 59분

텔아비브를 출발한 비행기는-이스라엘의 남부 엘랏항 상공을 거치면서, 이집트 영공에 들어서게 되며, 홍해상공을 따라서 비행한후, 에리트리아-지부티-소말리아 북부 상공을 거치면서 인도양에 들어서면서, 아프리카-극동아시아 노선과 겹치면서 방콕에 도착하게 된다. 총 소요시간은 10시간 30분 정도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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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IST-BKK간 노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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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IST-BKK 노선의 소요시간. 08시간 25분.

이것은 사진 4, 5로 볼 수 있는  이스탄불-방콕행보다 2시간 05분 정도 소요시간이 걸리는 비행편이며, 이러한 이유로 이스라엘에서 동남아시아 및 동북아시아행 비행편은 매우 비싼값에 팔린다. 이스라엘은 만일 왕따국가가 아니었다면 유럽과-아시아를 연결할 수 있는 절묘한 위치에 있는 국가이지만, 외교적인 문제 및 공항 보안의 까다로움으로 인하여 텔아비브 공항은 세계적으로 환승율이 가장 낮은 공항에 속한다.

또한 분쟁으로 인하여,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는 국가간이라도 영공통과를 금지하는 경우가 있으니, 우크라이나-러시아가 대표적인 예이다. 2014년 발생한 우크라이나 분쟁은, 양국의 외교관계가 단교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우크라이나는 실질적으로 동부지방 및 남부 크림반도를 상실하였으며, 친서방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둘의 관계는 2015년 민스크 휴전조약이후에도 계속 악화되었으나, 공식적으로는 단교하지는 않은 상태이나, 2015년 10월 우크라이나 의회에서 통과한 러시아 민항기 우크라이나 영공통과 금지법은, 이둘 국가의 교류를 실질적으로 막아버리게 되었다.

모스크바-키에프 노선은 분쟁에 상관없이 연간 100만명이 애용하는 노선이 었으며, 러시아 항공사는 키에프 외에, 러시아 각 주요도시에서 우크라이나 지방도시인 오데사, 드니프로제르진스크, 하르키우 같은 우크라이나 주요도시에 매주 7만명이 양국을 오갔을 정도로, 황금어장 같은 노선이었다.

그러나 2015년 10월 25일 우크라이나의 금수조치는, 양국간의 교류를 실질적으로 감소시키었으며, 또한 양국항공사에게 엄청난 손해를 미치기 시작하였다. 특히 러시아 같은 경우는, 자국에서, 루마니아, 불가리아, 몰도바 및 터키 이스탄불행 노선에서 외국 항공사 보다 1시간 이상 걸리는 노선으로 우회하여서 운항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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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 S7항공의 DME(모스크바)-KIV(키쉬노프) 노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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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 에어 몰도바 항공의 같은 노선도, 확실히 직선임을 알 수 있다.

이 조치로 인하여, 사실상 제 3국 항공사들은 러시아 노선에서 프리미엄을 보기 시작했는데, 그 예가 사진6, 7.에서 보이는, 모스크바-키시노프(몰도바) 노선이다. 러시아 항공사들은 우크라이나의 제재로 인하여 원래 1시간 40여분 걸리던 우크라이나 영공 경유노선을 상실하였기에, 벨라루스-폴란드-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 영공을 경유하는 3시간 노선을 운항하고 있는 상태이나, 두 국가 제재에 영향을 받지않는 외국항공사인 Air Moldova는 1시간 40분 직항을 그대로 운영중이며, 이로 인하여 승객이 증가하여서 하루에 2편으로 최근 증편하게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하루에 1편씩 운항하는 S7, 아에로플루트 등의 러시아 국적 항공사들은 피해를 보게 되었으며. 자그마치 모스크바 발 국제선중 300여편 이상이 벨라루스 상공이나, 러시아 남부 카프카즈 지방상공으로 우회하여야 하는 항로 변경이 이루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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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 에어 아스타나 항공의 KBP(키에프)-TSE(아스타나) 노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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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 에어 아스타나KBP-TSE 노선 소요시간 4시간 24분정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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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0. KBP-TSE노선도, 흑해를 거쳐서 크림반도를 우회하면서, 그루지야, 아제르바이잔 상공을 경유하는 걸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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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1. KBP-TSE노선 소요시간, UIA노선은 비행시간이 사실상 6시간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피해는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여서, 러시아로 부터 받던 영공통과료가 감소한것은 물론. 사진 8,9,10,11에서 보이는거 처럼 자국 항공사인 우크라이나 국제항공도, 동쪽 방향으로 가는 국제선 노선은 최소 30분-1시간 우회하여야 하는 피해가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중앙아시아 노선 운항시 러시아 영공을 통과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4시간 34분 걸리는 키에프-아스타나행 노선은, UIA를 이용시 5시간 58분 즉 경쟁사인 에어 아스타나보다 사실상 1시간 30분 더 걸리게 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외교관계가 항공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큰편이다. 외교관계로 인하여, 같은 노선이면서 타 항공사보다 시간과 거리를 우회하게 되는 항공사도 생겨나며, 이로 인하여 노선내의 경쟁에서 희노애락이 갈리게 되는게 외교관계가 항공산업에 미치는 영향인것이다.

항공으로 보는 세계 (1) 런던 상공

국제항공의 위엄 (1)

이 사진은 지금 현재 런던 상공이다.
런던은 1년에 5개 공항에서 1억 3500만명의 여객을 처리하며, 하루에 약 3000대의 여객을 처리하는 세계최대의 항공 밀집지라고 말할수 있다.

위 사진에서 보듯이 트래픽이 하도 많아서, 런던 히드로 공항 착륙시에는 4곳의 지정된 스택(Stack)에서 서클링을 하면서 고도를 낮추는데, 이 써클링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트래픽이 많기때문에 지정된 한 스택에서 최대 5대의 비행기를 동시에 좁은 공간에서 고도를 낮추게 하여, 좁은 영공을 효율적으로 쓰는 의미가 있으며. 동시에 하늘의 교통정체가 났으니, 대기하면서 내려오라 라는 명령과도 같다.

런던상공이 이렇게 복잡한 이유는 바로 활주로 부족이다. 하루에 3000대를 처리하는 런던 5개 공항중, 그중 히드로는 1500대를 처리하며, 이것을 이착륙으로 나누면 약 새벽 04시 부터-저녁 23시까지 이륙 1500, 착륙 1500으로 3000트래픽을 처리한다. 이것을 하루 21시간 운영시간대로 나누면, 이륙만 시간당 71대, 착륙도 시간당 71대 정도를 처리하여야 하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이러한 운영은 피크타임때에는 시간당 100대 이상으로 불어나는것이 현실이다. 그러한 관계로 착륙시에는 최대한 다른공항에서는 4마일의 최소간격을 유지할떄, 히드로는 2마일의 간격을 유지하여야 하며, 또한 어프로치 설계를 항공기를 최대한 많이 수용할수 있는 방식을 채택하여서 운영하고 있다. 또한 다른 공항에서 이륙시 약 90초의 간격을 둔다면, 히드로는 그러한 시간여유가 없기 떄문에, 30초에 한대씩 비행기를 이륙시키며, 이륙후 선행 비행기의 후폭풍을 피하기 위하여 3개 방면으로 이륙항로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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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알못의 도전(1:중남미는 진정 포퓰리즘으로 망하였는가?:아르헨티나 1편 1946-1989년 아르헨티나의 경제역사, 거시경제관리 실패로 인한 몰락)

중남미는 진정 포퓰리즘으로 망하였는가?:아르헨티나 11946-1989년 아르헨티나의 경제역사, 거시경제관리 실패로 인한 몰락

일반적으로 중남미는 국내외 언론지상에서 포퓰리즘으로 인하여 경제가 몰락한 케이스로 간주가 되며, 국내여론도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편이 많습니다.

그러나 경제라는 것은 단순히 한 가지 요인으로 붕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구조적 요인이 시간에 따라 쌓이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은 단순히 포퓰리즘으로 망하였다고 간주하는 중남미 경제도 예외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인구 시리즈에 이어서 ALL SIDE OF KOREA에서는 중남미 경제를 논하고자 합니다. 진정 언론지상에서 이야기 하는대로 인기영합주의로 붕괴된 경제일까요? 아니면 다른 구조적인 요인이 더 작용하여서 붕괴된 경제일까요? 우선 가장 대표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는 아르헨티나를 한번 살피어 보겠습니다. 어떻게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현재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1946년 페론 당선이후의 아르헨티나 경제의 흐름을 중심으로 살피어 보겠습니다.

 

1946년 이후의 아르헨티나 경제

아르헨티나 현대 경제역사는 1946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1946년은 아르헨티나 경제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 이전 아르헨티나 경제는, 남반구에서는 어느 정도 건전한 구조를 가진 경제였으며, 수출품에서도 농산물을 위주로 한 1차산업 수출이 중심이기는 하였으나, 유럽인 인구의 유입과, 영국자본 및 유럽자본의 투자 등의 요소로 인하여, 남반구에서는 어느 정도 중간단계의 산업화가 되어있는 국가로 분류되었으며, 이러한 점은 1920년 원자재 가격 폭락 시, 이웃국가 브라질, 칠레에 비하여 아르헨티나가 덜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남미경제의 주요한 특징인 원자재 및 농산물로 대표되는 1차산물 생산 중심의 경제는 견고한 편이었으며, 이러한 구조적 특성으로 인하여 1946년 후안페론의 집권 및 2차대전 이후 농수산물 및 원자재 국제가격 하락의 여파로 인하여 전후 침체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를 극복하고자 CEPAL(라틴아메리카 경제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ISI(수입대체산업화)를 시작하게 되며, 기존에 투자되었던 영국계 자본의 국영화 및 IAPI(아르헨티나 무역진흥기관)를 설치하여, 수출입의 인위적 통제를 시작하였으며. 1947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발표하여 산업국유화를 통한 자립경제를 목표점으로 정부주도산업화를 가속시킵니다.

 

이러한 페론의 산업화 계획은 다량의 투자로 인하여 아르헨티나 경제를 일시적으로 발전시키게 되지만, 지속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며, 시작한지 얼마 안 된 1950년대부터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특히 중공업 및 인프라에 대한 과대투자는, 인플레이션의 심화 및 전통적 수출산업인 농업분야 생산의 악화로 한계에 부닥치게 되며, 1950년대-1960년대에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널뛰기 성장률이 동반된 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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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아르헨티나 GDP성장률 1961-2015)

아르헨티나 인플레이션

(사진2: 아르헨티나 인플레이션률 1960-2015)

 

이러한 난국을 타계하고자 1966년 Krieger 경제장관의 개혁은 수입대체화 산업화 정책의 일부조정 및 보호주의 무역기조에서 제한적 개방 무역기조로 전환을 시도합니다. 거시경제적 차원에서 인플레이션을 기존 30%에서 7.6%로 낮추며, 실업률을 잡는 등의 효과를 거두었으나. 실질적 임금의 하락이 있었기에, 그동안 정부가 조절하던 임금통제가 무너지면서, 궁극적으로 ‘Wage-Price Spiral’(물가 임금인상 악순환)을 불러왔으며. 인플레이션은 개혁 3년후인 1969년 7.6%를 기록한 후, 다시 상승세를 타게되면서 1972년에는 58%, 1975년 182.93%를 기록하게 되면서, 궁극적으로 아르헨티나 경제는 다시 혼란의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며. 결국 페론의 복귀 및 1976년 군사정 복귀 등의 악순환이 지속되는 요인이 됩니다.

 

결국 1970년대까지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정부의 인위적인 임금조절 및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저항, 이로 인한 정치불안 과 경제정책의 잦은 변경 또한 낮은 개방성으로 인한 세계시장과의 제한적 무역, 정부투자에 의존하는 국내경제의 성격으로 들 수 있으나. 그래도 성장세가 지속적 유지하였던 이유는 1958년경 파타고니아에 발견된 석유 대표되는 다변화한 원자재 수출로 인하여, 성장자체는 완만한 선에서 유지가 되며. 또한 산업화 기조 및 국영기업 중심의 인위적인 정부투자 및 보조가 국내경제에 지속적으로 유지된 점도 성장률이 완만히 지속적으로 올라간 이유이기도 합니다.

 

1976년 이후의 아르헨티나 경제

 

이미 만성적인 높은 인플레이션과, 널뛰기 곡선의 성장률로 인하여 악화된 경제는 1976년 정점을 찍으면서, 그 해 3월 이사벨 페론은 군사쿠데타로 축출당하면서, 다시 호세 비델라의 국가구국평의회의 군사정권이 들어섭니다.

호세 비델라 정부는 경제장관으로 캠브리지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철강산업 CEO출신이며 살타주 경제장관 재직시 보수적 경제정책을 수행하여, 보수파로 알려진 José Alfredo Martínez de Hoz를 경제장관으로 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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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Jose Alfredo Martinez De Hoz 경제장관)

De Hoz는 수입대체산업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으며, 또한 자유무역론자이었습니다. 그는 경제장관이 되자마자 무역자유화 조치 등의 친기업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또한 물가임금인상 악순환을 막고자, 임금인상을 긴급동결시키는 조치를 취하며, VAT(부가가치세)를 도입하고, 또한 상속세를 줄이는 조치를 취하는 전형적인 시카고 보이스의 통화주의를 본 딴 정책을 실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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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Adolfo Diz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장)

또한 중앙은행은 시카고 학파 출신의 Adolfo Diz를 임명하였으며, 동시에 금융 규제 자유화 조치를 명하고, 신용공급을 원활하게 하는 조치를 실행합니다. De Hoz의 정책은 일시적인 인플레이션 감소 (1976:443.7%->1981:100.76%) 그리고 IMF 및 미국 금융기관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면서 75년 –0.03%, 76년-2% 연속 마이너스 경제 성장률을, 77년 8년만에 처음으로 6%이상대로 높이는데 성공하면서. 군사정권 유지에 기여하며, 그 후 원자재 가격 인상 편승효과를 받은 아르헨티나 경제는 78년을 제외한 79,80년 평균 7%대의 경제성장률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이시기 그의 세수정책 및 고금리정책(70~100%)으로 인하여 수효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중소상공인의 도산이 속출하였으며, 실질임금은 40%감소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아르헨티나표준금리

(사진 5: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레박 기준금리 흐름 1979-2016)

결과적으로 De Hoz 정책의 효과는 1979년~82년 사이에 감행된 미국의 연속적 금리인상으로 인하여, 완전히 무너집니다.

특히 1976년 조치로 인하여 무역량의 증가로 전반적 경제성장률은 상승하였으나, 자본유출이 심화되는 효과 및 일반 근로자의 소득의 감소가 진행되어서 내수시장의 체력이 약해진 상황이 발생하였으며.

미국의 폴볼커 미 연방준비위원회가 1970년대 말부터 실시한 금리인상은 70년대 오일쇼크의 효과로 들어온 외채의 이자 부담률을 높이게 되었으며. 기존의 자본유출이 내국인의 자국금융기관 비 신뢰로 인한 유출이 많았으나, 상대적으로 많은 이자 수익을 노린 외국자본의 투자로 유출분의 손실을 땜방하였으나.

80년대에는 민간차관 등의 국제투자자본이 대량유출되는 상황을 맞게 되면서, 서구이자율 상승->외채지급불가능->IMF차관도입->고금리 및 긴축유지->자본도피 및 손실분 채우기식 수출증가->원자재 국내공급 저하->생산하락->초인플레이션->수츨증가->원자재 가격하락->원자재 수출증가->가격하락->금리유지->차관 재도입->외채지급 불가능 식의 다중 악순환이 1990년대 까지 이어졌으며. 정부가 취할수 있는 유일한 거시적 조치는 통화 팽창정도로만 한정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의 시작은 1981년부터 시작되었으며, 82년 라울 알폰신의 민주정이 들어선 후에도 지속됩니다.

알폰신 정권의 1980년대 아르헨티나는 초인플레이션의 시기가 지속되며, 화페가치가 폭락하면서, 경제성장률은 4%대를 넘지 못하며, 기존화폐를 대체하는 아우스트랄 정책이 발표되었으나, 이것은 인플레율을 85년 90%로 낮추는 등의 1년기한의 효과만 거두었으며, 화폐개혁의 약발은 4년 후 멈추게 되어 초인플레이션은 지속되며, 알폰신 정부가 물러가는 1989년 3089.81%를 기록하게 되면서, 1970년 중반부터 시작한 아르헨티나의 통화주의 실험은 처참한 실패로 마무리 됩니다.

왜 통화주의 개혁은 실패하였을까요? 우선적으로 정부정책의 비일관성으로 인한 신뢰하락을 들 수 있습니다.

통화주의 개혁의 정책적 의도는, 지출을 줄이고, 임금상승을 억제하여서, 통화팽창을 막음으로써,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면서, 근로동기를 부여하며, 고금리정책을 인위적으로 발생시키어서 저축율을 늘리는 효과를 거두어서, 정부주도의 인위적 자본투입이 아닌 실물경제 내에서 차후 성장동력자본을 마련하는 것이 정책의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 실행은 선행조건이 마련되어야만 가능합니다, 우선 인플레이션이 원래부터 낮아서 금융기관 이용률이 높아야 하나, 아르헨티나는 세계경제 호황기인 60년대부터 낮은 성장률에 비하여 비교적 인플레이션을 기록하고 있었기에, 금융기관 이용률이 다른 산업국에 비하여 매우 낮은 수준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점은 금융 및 경제 기관에 대한 신뢰라는 선행적 조건을 창출하지 못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르헨티나 정부의 경제 정책은 66년 개혁 때부터 일관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였으며, 국영기업 고용비율이 높았기에 정부가 임금통제를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억지장치가 약간 균형이라도 유지하는 동력원이었으나.

66년, 75년, 76년 경제조치 및 개혁은 정부의 인위적 통제를 상실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경제 주체자들의 신뢰에 기반한 재화공급이 급격히 하락하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외채위기와 IMF 구제금융으로 인한 외부세력의 국가정책 개입은, 정부가 비상시 선택할 수 있는 조치를 제한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통화팽창이 유일한 선택지가 되어서, 이러한 요인들로 인하여 통화주의 정책은 실패한 걸로 보입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전후 1946-1989년의 아르헨티나 경제는 몰락하였고, 이러한 몰락의 부담은 아르헨티나 국민모두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아르헨티나 경제는 2000년 경에야 겨우겨우 회복의 길로들어서게 됩니다. 냉전시기 아르헨티나 경제의 문제는 포퓰리즘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1946-1975년까지 실행되었던 수입대체산업화는 결과적으로 시장왜곡 및 국영기업중심의 경제를 창출하였으나, 수입대체산업화를 실시한 이유는 당시에는 합리적인 이유였으며, 페론이 단지 인기를 얻기위해서가 아닌, 세계시장의 변동에서 자국경제의 면역을 높이기 위한 동기에서 국제연합산하 CEPAL(라틴아메리카 경제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추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페론자신이 인기를 높이기 위하여 집권기간동안 급여를 높이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경제의 전반적인 흐름인, 수입대체산업화는 그 이후의 군사정권 및 민간정부로의 정치변화가 극심한 50-70년대 상황에서도 계속 이어지게 되기에. 아르헨티나의 문제의 원인이 포퓰리즘이 아니라는거는 분명해 보입니다.

개인적인 사견이라는 전제를 달고 작성하는 거지만, 필자가 볼 때는 효율적이지 못한 산업화 정책의 지속과, 그로 인한 거시경제정책의 잦은 변경으로 인한 신뢰 상실, 또한 지렛대를 하여야할 거시경제관리 실패로 인하여 아르헨티나의 경제몰락이 가속화 된 걸로 보입니다.

특히 거시경제정책이 정치적 상황에 자유롭지 않았다는 점과, 공공부문이 전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대에 달했다는 점은, 거시경제관리에서 정치적 독립성이 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내었다고 보면 될 거 같습니다.

즉 아르헨티나의 실패는 효용성 없는 정책이 씨앗이 되어서 부담이 증가되다가, 이 부담이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치면서, 정치적 문제로 발전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거시경제관리의 독립성이 상실되었으며, 그 이후 상황타계를 위하여 정책변화를 시도하면서, 신뢰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최후에는 거시경제통제력을 완전 상실하게 되면서 파국으로 향하게 되었다고 보면 될거 같습니다.

 

 

 

 

잡스러운 여행 EP 5 (러시아 특집 5부작: 1편 여행)

잡스러운 여행 러시아 1편

이번주는 러시아 1편 여행편입니다.

DJ Eric 의 러시아 여행 경험을 수다와 함께 재미있게 풀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부터, 시베리아 도시들, 그리고 모스크바의 다양한 모습 및 러시아의 아름다운 도시 페테르부르크,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러시아를 간접적으로 경험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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